2010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여기에 한 인간이 있다!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색다른 인간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현인(賢人)보다 더욱 신성한 사람이나 성인이 아니요, 하나의 <현대판(現代版)>인 것이다.
-F. 니체, 김태현 역,『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서울: 청하, 2002), p. 176.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 처형 당시, 예수를 가리키며 외친 말이다. 이 일화를 담아낸 수많은 그림이나 조각들 속의 예수를 보며 나는 어떤 종교적 상징성보다도 니체의 자전적 산문을 먼저 떠올렸다. 한 인물로 대변되는 <현대판(現代版)>, 즉 하나의 현대적 인간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역자의 해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란, 정장차림의 무표정한 도시인보다 오히려 체계에서 거세되어진 변방의 현대인(現代人)들에게서 극단적으로 보여진다. 자기 파괴적 시스템에 의해 상처 입어 눈을 돌려 피하고 싶은 풍경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서, ‘보라!’고 강요하지 않으면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풍요와 빈곤, 강자와 약자, 희망과 절망, 그 모순적 상황의 틈바구니들 사이에서 무기력해져가는 사람들에게서 현대라는 잔인한 시대의 참상은 그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늘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며 지나치는 일상들 속에서 채집한 노숙자나 걸인들, 그 외 여러 사람들의 이미지와 코스트코나 은평 뉴타운 등 특정 장소에서 필요한 구도에 맞게 촬영한 이미지들을 캔버스 안에서 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인물에 관해서는 (그들의 현재 삶의 양식을 반영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얻기 위해 그때 그때 스트레이트로 포착하였는데, 우연한 순간의 표정과 동작에서 인물의 다양한 비극적 특성이 자연스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작업들은 이러한 인물의 비극성과 연결고리가 이어질 법한 배경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불편한 상황을 야기하는 대립구조의 양상을 띠는데, 이는 종종 필연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회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조용한 침묵>, <뉴타운의 유목민>, <육식의 종말>, <침입자>, <비상구>, <휴식>과 같은 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이분법적 구조보다는 은유에 의한 상징적인 보여주기에 좀더 중점을 두어 <이 사람을 보라>, <바벨탑>, <구경꾼> 등의 작업을 하게 되었다. 브뤼겔의 <바벨탑>, 도미에르의 <구경꾼들>에서 사상적인 모티브를 착안하였다.

이전 작업에서 마블링은 ‘플라나리아(planaria)’라는 특정한 명칭으로, 사무실, 카페, 도심 속 거리 따위의 현대적 공간 속에서 사회 시스템과 충돌을 일으키는 현대인들의 숨겨진 파토스(Pathos, 주로 타성에 젖은 물질적 욕망 자체)로서 갈등을 일으키는 하나의 주체적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번 연작에서 마블링 패턴은 사람과 상황이라는 주체들이 빚어내는 대립구조를 거들어주는 보조적 역할로서 작용한다. 물론 부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인간의 어떤 정념(情念)을 가시화한 성질은 이어지지만, 각 작업의 내용에 따라 패턴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고 혹은 아예 부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마블링은 뾰족한 낚싯대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사람 모양에 불과한 속 빈 껍질(낚시용 작업복)로부터 분출해 나와, 벽에서 거대한 날개의 형상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마블링은 형식적으로든 의미적으로든 극대화된다. 반면 <휴식>은, 패턴의 개입 없이 대형마트에서 판매 중인 커다란 그네의자 위에 지하철에서 찍은 부랑자의 이미지를 앉혀 또 다른 하나의 현실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현대 사회의 체계가 뱉어내는 결과들은 여러 가지 경로로 나타나지만, 정작 눈앞에 벌거벗은 채 나뒹구는 현실은 쉽사리도 지나치는 법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돼지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처지를 배반한다. 좌절이 전제된 비상(飛上)을 향한 염원이란 비극적 꿈꾸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의 발현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개에 함축된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카루스와 이상의 몸짓은 한낱 현실 도피에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直視)함으로써 자기배반의 굴레를 끊어버리기 위해 시도했던 최대의 반항이었던 것이다. ‘진부한 실험’일지라도 계속해 나아가다보면, 그래도 ‘실패한 아름다움’보다는 나은 현실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